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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식인들 ‘정치’에 함몰돼 제구실 못해”

by k600394 2010. 8. 5.

문화일보 <파워인터뷰> 2010. 7. 30

“우리나라 지식인들 ‘정치’에 함몰돼 제구실 못해”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대학시절 이인호(74) 당시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지식인의 표상처럼 느껴졌다. 혁명과 학문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청년에게 ‘지식인과 역사의식’을 논하고 ‘인텔리겐치아와 혁명’을 소개하는 역사학자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후 20여 년. 그는 핀란드와 러시아 대사를 거쳐 서울대 명예교수 겸 KAIST(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로 돌아왔고 혁명과 학문을 차례로 떠난 청년은 기자가 됐다.이런 기억과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터뷰하는 일이 과거의 설익은 열정을 추억하는 여정이 되지 않으리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최근 그는 오도된 좌파사상이 초래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이념적 위기에 대해 낮지만 강한 경고음을 꾸준히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지난 26일 오후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에 위치한 자택에 도착하자 이 교수는 서재와 거실을 마다하고 작은 문간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10년은 족히 된 듯한 에어컨이 힘겹게 돌아가는 아래로 분홍색 보료와 방석이 놓여 있었고 낮은 문갑 위에는 손녀의 큰 인형이 머리를 절반쯤 땋은 채 누워 있었다. 자신은 방석에 앉으며 보료를 권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방바닥에 앉았다. 이 방이 유일하게 에어컨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지만 70대 원로학자의 이런 모습은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앞두고 머릿속을 맴돌던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그 소탈함에 의지하듯 그냥 묻고 싶은대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 최근 쓰신 칼럼 등을 보면 우리 사회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정신적 풍토랄까 그런 면에서 위기감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룩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생각하고 국가 전체적으로도 관심을 갖고 정책을 쓸 겨를이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삶에서 지켜지는 불문율이 완전히 깨져버린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너무 손상돼 정치에서도 극심한 분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그런 위기에 빠진 데는 사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어떤 사회건 정치 엘리트와 지식 엘리트 두 집단이 사회를 이끌어갑니다. 실제 역사를 이끄는 것은 대중이지만, 방향을 제시하는 데는 아무래도 더 배운 사람,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너무 정치에 함몰돼 지식인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은 삶을 길게 보고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며 질문하는 존재이고, 정치인은 우선 눈에 보이는 성과를 생각합니다. 역할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긴장과 갈등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란 성과를 거뒀지만 좀 더 가다듬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지식인인데, 지식인들이 스스로 정치화돼 자기 역할을 내던진 셈입니다. 정치인을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가치체계가 흔들려 일반 국민보다 크게 낫지도 않은 사람이 지도자 위치에 서고, 그래서 다시 대중의 반발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돼왔습니다.”

 

― 지식인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양심적이고 양식 있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내야 합니다. 군사독재 시기에 지식인들은 정부 눈치를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졌지만 대신 대중 쪽에서 오는 압력이 워낙 거세 더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정말 옛날보다 나아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식인이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 감각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인이나 돈 가진 사람, 권력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자기(지식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게 뭐 있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 과거 군사독재 시절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요즘은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분열돼 있는 것 같습니다.

“지식인이 집단행동을 할 때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일 때만 정당화됩니다. 99%의 국민이 공감대를 이뤘는데 제도가 잘못돼 있을 때와 같은 경우입니다. 찬반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의 집단행동은 정치적 행위이지, 지식인의 사회참여로 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4·19혁명 때 부정부패 척결은 국민 전체가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북관계에서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는 것과 관련해 교수들이 집단성명을 낸다면 지식인의 사회참여로 보기 힘들죠.”

 

― 요즘은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 가톨릭 등 종교계에서도 집단적으로 의사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적절치 않습니다. 가톨릭이 정치발전에 일정 정도 기여한 부분은 탄압받는 세력을 보호한 것입니다. 그건 근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선을 넘어 이것저것에 나서는 것은 종교의 본령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의 대화는 보편적인 언어로 해야 합니다. 편협한 테두리에서의 논쟁은 지식인의 대화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건 정치투쟁입니다. 우리 후배, 제자 세대가 큰 성취를 이뤄냈지만 정치 논의의 수준은 후퇴했으면 후퇴했지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논리적 대화가 아니라 생떼쓰기 수준입니다.”

 

― 군사독재 시대에 반정부 투쟁은 국민 전반의 공감을 얻지 않았습니까.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체제에 대한 도전은 국민의 이름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표로 수립된 정권을 타도하자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공격입니다. 정부를 인정하고 바른 일을 하도록 독려하는 게 야당 역할입니다. 정권 타도는 정치적 선동일 뿐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타도는 민주체제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최근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국가 정통성이나 정체성 문제에 대한 우려가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역사교육이 잘못돼서 그렇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선별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독립이었습니다.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를 수립하는 게 중요했고 국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봤습니다. 그후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됐고, 민주화와 반독재투쟁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민주화되면서 이름 없는 다수에 대한 배려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역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그건 아주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냉전시대 미·소 대립 속에서 국가를 출범시키다 보니 반국가세력을 안고 출발하게 됐다는 겁니다. 그런데 반국가세력을 다스리지 않는 국가는 존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도 냉전상황에서. 나는 러시아역사 전문가이며 국민학교 3학년생으로 해방을 경험한 세대입니다. 문맹률이 9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해방이 됐습니다. 그전까지 왕정이었고 35년간 주권을 빼앗기고 살다가 해방됐습니다. 정치의식이 높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낸 건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반면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습니다. 스탈린 말기의 소련은 공산주의 본래 모습과도 거리가 먼 흉폭한 독재체제였습니다. 우리가 스탈린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건 이승만 대통령 등 탁월한 혜안을 가진 분들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안 갔으면 지금 잘 됐다고 해봐야 동구권같이 돼 있을 겁니다. 이제 공산주의의 참모습이 드러난 상황에서 이 나라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국가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건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 최근 토론회에서 ‘좌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선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 아닙니다. 좌파, 우파보다 중요한 건 친북·종북세력이 권력을 잡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히려 막가는 공산주의를 막는 최선의 방법은 사회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북한이란 존재가 있는 특수한 케이스입니다. 안에서부터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에 이용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 그런 차원에서 보면 전교조의 최근 행태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전교조가 처음 생긴다고 들었을 때 나는 환영했습니다. 나는 교육부 행정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입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 하고 교사들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사로 근무하다 귀국해보니 전교조가 완전히 이적단체가 돼 있더군요. 어떤 보이지 않는 세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주 불합리하고 정치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을 합니다. 반미교육, 계기수업 이건 이적행위입니다. 단순히 미국에 대해 비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특정한 나라를 아귀처럼 묘사하고 그릇된 국제의식을 길러주는 건 교육이 아닙니다. 그건 정치적 선동이고 반교육적 행태입니다.”

 

― 우리 사회의 이런 정신적·이념적 혼선과 분열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된 게 바로 천안함 침몰 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반미의식이 그만큼 우리 의식 속에 깊이 파고들어 갔다는 얘기입니다.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켰다는 거죠. 우리 정치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겁니다. 대안이 없으면서도 덮어놓고 비판하는 의식구조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의식 교육 면에서 정말 패배를 했고 큰 문제를 안게 됐습니다. 그 원죄는 유신 때부터 폐쇄적 교육을 시켜서 그렇다고 봅니다. 공산주의에 관해 전혀 배울 수 없게끔 정보를 차단해놓고 ‘공산주의는 나쁘다’ 하니까,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저런 소리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북한과 숨어 있는 친북분자들이 맹렬하게 활용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좌파상업주의가 한몫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기득권세력이 됐죠.”

 

― 이미 북한체제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종북주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어렵게 사니까 동정심이 가는 겁니다. 북한을 위험세력으로 보지 않고 약자로만 보기 때문에 종북세력의 조종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안고 있던 딜레마는 한 가지 아닙니까. 동족이니까 같이 잘 살아야 하는데, 도와주면 무기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부 때 ‘우리가 자신이 생겼으니까 한번 믿고 줘보자, 그러면 저쪽에서도 동족끼리 잘 살자는 의도로 믿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한 번 정도 해볼 만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북한의 반응이 어땠는가를 봐야죠.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돼 대북포용정책을 선전하는 역할을 했는데, 초기에 큰일났구나 하고 느꼈어요. 김 대통령 정책은 ‘우리가 무조건 준다, 대신 도발하는 건 절대 용서 못한다. 한미동맹을 굳건히 지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켜지지 않았죠. 북한은 처음부터 도발을 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할 때 우리는 무작위로 뽑아 보냈지만 저쪽에서는 월북한 최덕신 전 외무장관 부인을 대표로 보냈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가 황장엽씨를 이산가족 방문단장으로 보낸 것이나 똑같은데 거부했어야 합니다. 국가의식이 그만큼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북한이 아무렇게나 해도 되겠구나 만만하게 본 거예요. 그 다음에 핵개발이고 뭐고 자기 멋대로 한 거죠. 물건을 준 게 문제가 아니라 지킬 건 지켰어야 한다는 겁니다.”

 

―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이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지는 않았죠. 결과적으로 외교에서도 실패한 꼴이 됐는데. 국제사회가 결국 중국을 의식하니까 동남아 나라들도 그렇고 유엔가입국들도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말이 앞서 나가고 실천이 뒤따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현 정부의 전반적인 외교정책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그럭저럭 그냥 괜찮게 했다고 봐요. 이전 정부에 비해 미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미국이 좋은 나라여서가 아니라 그 나라 처지로 볼 때 우리하고 상충되는 것이 다른 나라보다 많지 않은 편이니까 활용할 여지가 많고, 중국은 생활수준이 우리보다 낮은데 세력으로는 막강하니 우리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문제를 속으로 잘 생각하면서 해야죠.”

 

― 최근 현 정부의 소통 부족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사정책에서 국민이 기대하는 수준의 인사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겠죠. (‘고소영’, ‘강부자’ 등으로 대표되는 연고주의 문제를) 기계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국민이 볼 때 너무 속 보인다 하는 수준으로는 가지 말아야 했다고 봅니다.”

 

― 인사뿐만 아니라 세종시 수정안 부결이 말해주듯 정부의 정책 추진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물론 문제가 있었겠죠.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세종시 문제가 잘못된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표를 인식해 ‘(세종시 공약) 만들어서 재미 좀 봤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세종시 원안이 통과됐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지역균형발전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그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그걸 위해 기관을 강제로 옮기는 건 잘못하는 겁니다. 수도로서의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전부 옮긴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안 되니까 편법으로 한 건데, 다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주장도 참으로 어설픈 얘기입니다.”

 

― 우리 사회의 위기 극복을 위해 리더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결국 나라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인터뷰 = 박민 전국부장 minp@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