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바틀비
김소연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
던 맹세가 흙마당에서 만개해요, 사월의 마지막 날은
한나절이 덤으로 주어진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공
평무사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날아보자던 나
비들이 날개를 접고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봄날이
에요, 저것들 보세요, 금잔화며 양귀비며 데이지까
지 모두가, 아니오, 아니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루
를 견뎌요,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온 세상 나비들은 꽃들의
필경사예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쉬
는 한숨으로 겨우 봄바람이 일어요, 낮달이 허연 구
멍처럼 하늘에 걸려요, 구멍의 바깥이 오히려 다정해
요, 반나절이 덤으로 배달된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
가 대동단결하여 불행해질 때까지 시들지 않겠다며
꽃잎들은 꽃자루를 꼭 붙든 채 조화처럼 냉정하구요,
모두가 완전무결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지는 해는 어금
니를 꽉꽉 깨물어요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21>에서
* 행복, 불행은 자본주의 용어이다. 생명은 자본주의 보다 먼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