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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600394의 diary
길에서 길을 묻다

길에서 길을 묻다 33: 하얼빈 ASRS 국제학술대회 참가기

by k600394 2015. 7. 22.

 

 

첫날

비행기는 정시에 가볍게 날아올라 서해안을 거쳐 북으로 향한다. 기내에 탑승하자마자 울산대학교 조교수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비행기에 탑승하셨지요? 하얼빈공항 짐 찾는 곳에서 만나요. 우리 집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어서 찾기 쉬울 것입니다” 정중하고 따뜻한 목소리이다. 그리곤 두시간 동안 미술책을 열심히 탐독했다. 애호하는 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푸른 논밭만 보이더니 어느 덧 하얼빈공항이란다. 비행기와 탑승구를 연결하는 브릿지가 없어 짐을 들고 버스를 오르내려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귀국할 때 하늘에서 보니 국내선 쪽에는 브릿지가 갖추어져 있었다. 국내편 이용객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듯하다.

짐 찾는 곳을 찾아갔더니 모자를 쓴 중년여성이 눈에 띈다. 기내에서 바로 뒷자리 앉으셨던 부부가 아니던가. 교수라는 직함이 참 잘 어울리는 부부라는 느낌이다. 서울대학교 김교수님까지 합류하여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김교수님은 체온이 약간 높아서 확인받느라, 나는 레이저 짐 검사 때 책을 꺼내서 내용을 확인하느라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택시기사들이 호객에 나선다. 조교수님께서 흥정하셨어 200위엔에 호텔로 향하기로 한다. 호텔에 도착하자 톨케이트 비용을 더 요구해서 30위엔을 더 주었다. 영어는 통하지 않고 막무가내이고 운전은 험하기 이를 데 없다. 택시가 한 국가의 얼굴이라는 게 실감난다. 택시 타기가 불안하다는게 중론이다.

학회 관계자가 호텔에 부스를 마련하고 있다. 참가비 1200위엔을 내고 방을 배정받는다. 할인받아서 1박에 12만원 정도이지만 호텔 수준은 아주 높다. 지방도시에 이 정도의 호텔이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싶다. Sofitel-Wanda 호텔. 중국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완다그룹이라서 가능한 일을 것이라고들 한다.

 

둘째날

이른 시간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7시 50분에 중국 측에서 제공해준 버스편으로 HIT(Harbin Institute of Technology)로 향한다. 첫날은 발표는 없었지만 학회의 대략적인 분위기라도 알아보자는 심산으로 함께 출발했다.

20여분 만에 도착한 학교는 제법 규모가 컸다. 막상 개회되자 세밀한 곳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우선 키노트 스피치에서 중국학자가 통역 없이 중국말로 발표를 하는 것이다. 외국학자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 다음 일본학자의 키노트 스피치에서는 마치 논문 발표인 듯 계량적 수식으로 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적어도 키노트스피치라면 그 분야의 큰 흐름이나 정책을 소개하는 것이 상식일텐데... 쉽게 이해가 가진 않는다.

클라이막스는 그 다음이다. 중간에 내일 있을 발표논문을 요약한 몇 장의 자료를 출력하려고 로비로 나왔다. 도와주겠다더니 누구를 찾는 등 갑자기 부산해졌다. 진행은 이렇게 되었다. 차를 가지고 있는 남자를 수배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발표장 건물에서 3분쯤 거리에 있는 다른 블록의 교내 유료 복사가게로 가서는 자기네 돈으로 가격을 지불하고 출력하는 것이었다. 교내 강의시설과 컨벤션홀은 자동차로 이동해야 할 정도의 블럭으로 구분되어 있고, 컨벤션홀에서는 인터넷 지원도 되지 않고 출력할 수 있는 시설도 없는 까닭이다. 국제학술대회 창구에 컴퓨터와 프린트를 갖추지 않고 있다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하튼 자기 일같이 끝까지 함께 해준 임초라는 사회학 전공 여학생에게 나중에 조그만 선물로 고마움을 표했다.

교내 식당에 마련된 점심을 마치고 나는 슬그머니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기 위해서이다. 택시를 탔더니 기사와 영어가 통하지 않아 지도를 보여주고는 출발. 약 20분 만에 도착한 하얼빈역은 주말이라 그런지 인산인해이다. 좌석등급별 발매창구, 출입구 앞에는 엄청난 줄이 늘어서 있어 마치 과거 우리 명절날 서울역 앞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더운 여름 날씨에 그냥 바닥에 앉아 기다리는 많은 승객들과 물, 1인용 간이 의자 등을 판매하는 노점상까지 함께 하면서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몇 번을 찾아 헤매다 역사의 좌측 편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아 입구는 한산해 보였다. 입구의 웬 남성이 여권을 보여 달란다. 보여주었더니 그냥 입장해도 된단다. 왜 보자고 했을까? 규모는 소박했고, 역사 쪽으로 향한 통유리를 통해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념관내에는 안중근의사의 탄생과 저격 당시수일간의 행적, 그리고 체포된 후 재판과정이 사진과 함께 중국어와 한국어로 소개되고 있었다. 사용된 권총 사진, 이토를 관통한 부위까지 소개하고 있어 내실을 담으려는 고심 흔적이 보인다. 이토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면서 여의치 않았을 경우를 가정하고 고심하던 내용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특히 재판과정에서 재판장에게 “사형보다 더 큰 형량은 없느냐”라고 일갈하는 대목에서는 숙연해진다. 31살에 대의와 소명의식으로 삶을 마감하던 그 당당함에 지난 나를 되돌아보게도 한다. 망우리에 묻혀 있는 방정환 선생도 그 암울한 시절에 미래의 초석으로서 어린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어린이날까지 제정하고 돌아가신 때가 20대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려고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탔다. 지도를 보여주었더니 조금 출발하는듯 하더니 도로가에 택시를 세우고 중국말로 계속 무엇이라 외쳐 된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무어라 하는데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신호대기에서는 창문을 내리고 다른 택시기사에게 하소연하는듯 하기도 하고, 합승을 시도했지만 불발에 그치기도 했다. 결국 나중에는 포기한 듯 출발하여 호텔에 도착하긴 했지만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른다.

잠깐 수영을 마치고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호텔 앞 광장에서 한국에서 온 교수님들끼리 맥주 한잔 하자는 연락에 합류했다. 하얼빈맥주는 중국 최초의 맥주라고 하는데 상온에서 먹는 것이 최고란다. 그렇지만 이 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얼린 맥주를 찾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전반적으로 칭다오맥주보다 싱겁게 느껴지는데 푸른 색 상표의 하얼빈 맥주가 보다 진하다.

 

세째날

오전에 다시 발표준비를 마치고 다른 세션을 기웃거리다가 오후 가장 마지막 시간에 발표를 하게 된다. 발표자 배정은 많았지만 정작 발표에 참가한 참가자는 적었고 거의 파장분위기이다. 발표주제는 ‘서울 도심제조업의 산업생태계, 세운지구를 중심으로’. 가볍게 발표를 마치는데 질문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서울 자체에 관심이 많아서 인 것 같다. “서울 도심의 새로운 성장엔진은 얼마나 있는가?” “얼마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층빌딩과 혼재되어 있는가?” “도심제조업 산개된 형태가 아니라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그럭저럭 답변을 했는데 맨 마지막 질문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다. 발표 후 개인적으로 만나 질문내용을 다시 확인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이다. 중국식 영어가 이렇게 어려웠던가? 북경 공무원교육원 교수인 그에게는 명함을 건네주면서 나중에 이메일로 질문을 다시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 학교 역사박물관 투어가 있었지만 다들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저녁은 호텔 소개로 인근 식당을 찾았다. 벽에 걸려 있는 요리사진을 보고 주문을 하면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다. 당연히 음식이 나올 때마다 성공과 실패로 희비가 엇갈린다.

 

 

 

 

 

네째날

발표도 마쳤겠다 들떤 마음으로 테크니컬 투어에 오른다. 그런데 고난행군에 더 가깝다. 첫 방문지는 송화강변에 위치한 습지(wetland)였다. 호텔에서 50여분을 달려 입구에 도착했고 다시 코끼리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이동, 여기서 다시 배편으로 어떤 조그만 섬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다시 몇몇 섬을 이어주는 목재 보행로를 따라 출발지로 걸어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1년 중 한 열흘 정도 있다는, 30도에 가까운 더운 날씨에 투어 참가자들은 모두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게다가 창녕우포습지를 연상하고 갔지만 아주 딴판이었다. 지근거리에서 건물을 짓는 현장이 목격되었고 대규모 어린이놀이시설까지 들어서 있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이 다오타이 건물유적이다. 청나라시대에 중앙정부 관청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전체적으로 건물군은 잘 유지되고 있는 듯했으나 건물 하나하나는 앞으로 더욱 보전관리가 필요한 듯하였다. 여기서도 설명을 중국어로만 진행하여 다시 귀머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차창 밖으로 내다 본 중심가 도로는 아주 넓고 인도도 그에 못지않게 넓다. 하지만 운행질서 때문에 도로는 번잡했고 지체되었으며, 가로수가 보이지 않는 인도는 자동차로 점유되고 있었다. 앞으로 자동차가 더욱 늘어 날텐데 이들은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마치 우리 의 일처럼 걱정된다.

다음은 라오다오와이 바로크건축양식 거리이다. 과거 우리의 서울 청계천변처럼 각종 공구, 건축자재 판매상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 라오다오와이에 들어섰다. 중정을 갖춘 건물군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바로크건축양식을 알지 못해서 아쉽기는 했지만 곳곳에서 새롭게 정비했거나 새로이 고치는 건물이 발견되어 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과거 역사가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다소 조잡하게 복원되고 있는 느낌이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차안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대신한 성소피아성당을 거쳐 마지막 목적지 central street에 도착했다. 우리의 명동 같은 이 거리에서 1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파리에서 세느강, 서울에서는 한강’을 외치며 하얼빈에 왔으면 송화강을 보고 가야 한다며 송화강변으로 직행하였다. 유람선도 보이고 멀리 케이블카도 보인다.

기념품점도 들려본다. 별로 살 마음도 없었지만 턱없이 높은 가격 때문에 아예 포기한다. 너무 햇살이 강해 오전 습지에서 10위엔에 구입한 모자가 이곳에서는 128위엔이다. 품질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명품과 짝퉁의 가격차이 만큼 된다. 고무줄 가격...

 

 

 

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까 하다 호텔로 간다는 버스에 오른다. 돌아오는 택시를 타기도 힘들 것 같고 몸도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호텔에서 잠시 쉬기로 한다.

호텔 전면에서 9홀 골프장이 있다. 의외다. 시내 중심가에 녹음이 우거진 이런 큰 골프장시설이 있다니. 내일 새벽에 운동이나 해볼까 싶어 문의를 해보았더니 아쉽게도 7월 16일자로 폐쇄되었단다. 혹시나 싶어 챙겨온 골프화를 한 번도 꺼내보지 못하고 가져가게 생겼다.

저녁에 교수님들과 함께 백화점 내에 있는 철판구이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고 나오려다 1층에 마련된 80%할인 폴로할인 행사. 허리띠 2개를 골라 샀다.

 

마지막날

출발시간에 여유가 있었기에 마음 놓고 잤더니 눈을 뜨니 아침 9시. 허겁지급 아침식사를 마치고 11시 호텔 프론트에 함께 모인다. 모두 7명이 택시 2대로 나누어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호텔 벨맨의 도움을 받아 상대적으로 큰 택시는 180위엔, 작은 택시는 150위엔으로 흥정을 마쳤다. 공항에 도착하자 작은 차의 택시기사는 톨게이트 비용 30위엔을 추가로 달라고 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전체 150위엔으로 하기로 흥정이 끝났는데... 하는 수없이 추가부담을 했다. 미터기에는 114위엔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큰 택시기사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택시는 국가의 마지막 이미지이구나 싶다.

일본에서 택시를 탈 때의 기분, 그리고 한국과 중국에서 택시 탈 때의 기분차이가 국력의 차이로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5일간의 긴 시간. 진지한 교수님, 친절한 교수님, 열정적인 교수님, 발랄한 젊은 교수님까지 다 기억에 남는다. 그 중 어릴 때 조선인학교를 다녀서 우리말에 능숙한 재일동포이자 아직도 한국 국적을 간직한 교토대 문세일교수님, 일본으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환승해야 했는데 그 입구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환한 웃으며 기다리던 모습이 짠한 마음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