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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600394의 diary
길에서 길을 묻다

길에서 길을 묻다 79: 프랑스 파리2

by k600394 2019. 11. 22.



1.

파리까지 비행하는 11시간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먹고 자고 그 나머지는 책 읽는 일 정도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챙겨넣은 책이 있었으니 유럽관광 안내책자 외에 '여행, 길 위의 철학(책세상 발행)'이다. 주로 철학이나 신학 전공의 교수들이 저명한 철학자나 신학자를 선택하여 그들의 생을 도시중심으로 일별하고 그의 사상과 시대상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로카세카에서 태어나 나폴리대학에서 수학하였고 1244년 도미니크회의 수도사가 된다. 이후 나폴리를 떠나 여행하다 1256년 파리에서 신학교수로 자리잡게 된다. 이 때의 신학교수는 주로 학교와 수도원들을 오가며 강의를 하였다.

그러면 그 때의 여행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첫째는 바다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랍인들이 돛을 이용할 수 있었던 반면 라틴족들은 그런 지혜가 없었다. 그래서 14세기가 될 때까지는 12월부터 그 다음해 3월까지 바다는 '폐쇄'되었다. 둘째 육로를 이용할 수 있는데, 주로 사람은 걷고 말은 짐을 싣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로 강을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명한 주교가 방문하는 마을이나 수도원에서는 이들을 위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이 부작용이 자못 심각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학이 설립되면서 지식인들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여행도 활발해졌는데, 식당이 숙박 영역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의문과 문제 제기가 있어야 진실에 이를 수 있다면서, 여행을 통해 의문을 풀 수 있고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여행의 의의를 강조한 사람은 또 있다. 고흐 미술 여정의 첫 장은 여행부터라고 꼽기도 하고 루소도 스스로를 '영원한 여행자'라 칭한다.

 

파리는 거의 10년만이다. 도시답사 동아리 제자들과 2010년 8월에 라데팡스와 파리로 배낭여행을 와서 일주일 머물렀다. 그때 갑작스런 복부 통증으로 데굴데굴 굴렀던 난감했던 상황이 생각나고, 월요일 휴관을 생각치 못하고 여행 마지막날 찾았던 오르세미술관에서 아쉬운 발길을 돌렸던 기억도 아련하다.

 

나중에 확인하였지만 파리의 미술관의 휴관일은 월, 화 등 다 다르다. 하물며 수요일에 휴관하는 미술관도 있다. 오늘 월요일을 감안하여 휴관하지 않는 미술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먼저 지하철이용권부터 구매해야 했다. 지하철역사에서 일주일 이용권인 '나비고'를 구입했다. 이 때 여권과 사진이 필요한데 역사 인근에 급속 사진촬영시설이 있어 5유로로 증명사진 몇 장을 마련할 수 있다.

처음으로 찾은 곳이 알렉상드르3세 다리를 지나서 있는 오랑주리미술관이다. 원래 오렌지 등을 키우던 궁중온실이었던 이 미술관은 루브르궁의 튈르리 정원에 있다. 2개의 방에 8개의 연작을 전시하고 있는 모네의 수련. 흐릿한 수련의 채색 이유를 모네의 안과질환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의 독특한 채색기법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지하층에서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Seurat, Bonard에다 미래파의 Giacomo Balla, Umberto Boccioni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곤 요일과 무관하고 지난 추억이 남아 있기도 한 몽마르트 언덕, 백색의 사크레 쾨르 성당을 찾았다. 옅은 비에도 초상화가의 호객은 여전하다.

툴루즈 로트렉트 그림에도 등장하는 물랑루즈를 찾아가는데, 남녀를 불문하고 접근하는 호객꾼이 많다. 집요해서 뿌리치기도 힘들 지경이다. 이들 눈에는 내가 여전히 남자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인근에 sex shop, live show 간판이 수두룩하다. 발길을 돌려 드가의 묘소가 있다고 알려진 몽마르트묘지도 찾았지만, 입구를 찾기 어려워 담장밖에서 들여다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역무원 몇 명이 불시에 티켓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하철 역사마다 역무원을 두는 대신 불시 단속으로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2.

화요일. 분명 오르세의 휴관일이 아니다. 10년전 악몽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요일을 확인한다. 1986년에 개관한 오르세미술관은 원래 기차역이었다가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미술관에는 1789년 대혁명 부터 1848년 2월 혁명이후 제2공화국까지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많은 애호가들이 다녀왔고 많은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주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소개된 정보에 따라 5층부터 1층씩 내려오기로 했다. 5층에는 쇠라의 작품부터 시작한다. 신인상주의 대표자 쇠라 Seurat는, 색상을 섞으면 밝은 기운 Luminous Intensity이 감소한다는 과학적 근거에 의하고 있다. 점묘법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쇠라의 서커스, 모네의 루앙성당 여러 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세잔의 카드치는 사람, 사과, 르노와르의 피아노치는 소녀, 모네의 카미유 모네의 임종 그리고 피사로, 모리조, 커샛의 작품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마네의 유명한 피리부는 소년, 올랭피아를 보려면 0층으로 와야 한다. 나비파의 Bonard, Vuillard 작품 그리고 쿠르베의 사실주의 작품도 0층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드가의 특별전이 0층에서 진행중이었는데 파리지안은 대거 여기에 몰린 듯하다. 움직임의 미술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스킵플로아를 이용해 곳곳에 소장전이 전시되고 있어 열심히 관심가지고 돌아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일 듯하다.

나도 마티스의 '사치 고요 관능'은 못 본 듯하다. 조각 작품이 집중 배치된 곳이 0층인데 로댕의 지옥의 문도 감상할 수 있다. 클림튼으로 대표하는 상징주의 작품 코너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년을 기다렸던 오랜 소원을 풀은 듯 하여 관람을 마치고 나니 기운이 빠진다. 센강변에 나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센강의 유일한 인도교인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교도 구경하면서 말이다.



 

3.

퐁텐블로 Fontainebleau .

오늘 방향을 이쪽으로 잡은 이유는 바르비종파의 본거지에 해당하는 바르비종 마을이 인근에 있고 '나비고'로 쉽게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퐁텐블로는 왕과 귀족의 사냥터였던 아름다운 산림지역이고, 프랑수아1세때 건축한 퐁텐블로성은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사랑을 속삭였던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리옹역으로 가서 TER ligne 국철을 이용하여 퐁텐블로-아봉 Fontainebleau-Avon에 도착했다. 퐁텐블로성으로 가는 1번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흔적이 잘 남겨진 성내를 구경한다. 그러다 마침 하교시간과 맞물리면서 12시 44분 바르비종행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택시를 부르기 위해 관광센터 직원이 친절하게 메모해 준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기대와는 달리 자가용 영업차가 나타났다. 택시면허증을 보여주며 애써 택시라고 강조한다. 이런 시골 동네의 관습인 것 같기도 하다. 요금은 25유로로 낙착되었고 올 때도 그 가격으로 믈랭 Mulen역으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퐁텐블로숲은 프랑스 최고의 숲이고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바르비종 Barbizon은 지금 돈많은 은퇴자들이 사는 고급주택가로 변신했단다. 운전자도 자신의 꿈이 여기서 사는 것이라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이 날은 가게며 갤러리도 문을 닫은 곳이 많다. 밀레미술관도 닫혀 있었다. 우연히 물건을 옮기던 미술관계자를 만났는데 오늘이 휴일이란다.


 


바르비종파에는 루소, 코로, 뒤프레, 밀레 등이 속한다. Auberge Ganne은 과거 이들 작가들이 머물렀던 곳을 복원한 기념관이다. 다행히 개방되어 있었다. 벽에도, 가구에도 그들의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대적으로는 무거운 주제의 작품만 예술로 인정받고 경관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홀대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경관은 재건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충분히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주장하면서 진솔한 서민의 삶과 경관을 담아낸다. 철도가 개통되자 고흐를 비롯한 많은 파리 인상주의 작가도 이 곳을 다녀가면서 색의 진솔성 sincerity of colour에 놀랐다고 전한다.

이 기념관을 지키던 두 사람의 직원은 오직 한 사람뿐인 관람자, 더구나 공짜 손님인 나를 위해 40분 짜리 자료영화도 상연한다. 기부를 거절하는 이들을 위해 북마크 몇 개 구입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한다.


 

4.

오베르 쉬르 우아르 Auvers sur Oise.

참고로 오베르로 가는 방법은 다소 복잡하지만 크게 두 가지이다. Pontoise 방향의 Saint-Ouen I'Aumone역까지 RER C를 타고 가거나 파리 북역(Paris Nord)에서 ligne H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거기서 Creil 행으로 갈아타고 오베르역에서 내리면 된다. 나는 후자를 택했고 오전 8시를 넘겨 오베르역에 도착했다. 시골로 갈수록 우리도 다문화가족들이 많은 듯 여기도 모로코지역의 아프리카 베르베르 흑인 계열을 많이 볼 수 있다.

오베르는 고흐(1853 ~ 1890)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죽기 70일 전부터 거주하였고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던 곳이다. 곳곳에 그와 관련된 흔적들을 소개하고 관광상품화하고 있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흐의 마을이다.

하지만 대부분 오전 10시 이후라야 개방된다는 팻말만 보이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안내판에 소개된 루트를 보고 마을사무소, 오베르성당, 고흐와 동생 테오가 안식하는 시립묘지, 밀밭, 의사 가셰박사 저택순으로 밟아 갔다. 곳곳의 명소에는 고흐의 그림 팻말을 함께 설치해서 비교해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시립묘지 앞에 가면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묘지 위치도 소개되고 있다.

가는 길에 오베르 성 Chateau du Aubers에서 'vision impressioniste'라는 전시회가 있어 들어가 본다. 인상주의의 탄생, 특징, 변화 등을 첨단기술로 비교 구현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이제 11시가 되었으니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겠다 싶어 적극적으로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라부여관 3층의 고흐 아트리에는 복원되어 현재는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념품 판매원은 해설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혼자 뿐인 이 방문객에게 잘 들리지도 않는 프랑스영어로 열심히 설명하고 비디오방으로까지 안내한다. 1층은 여전히 카페로 이용되고 있었으니 비싸더라도 점심은 여기에서 해결해야겠다 싶어 자리를 잡았는데 맛은 둘째치고 짜기만 하다.

2시 반을 넘겨 오베르역에 당도하고 보니 당분간 Pontoise로 가는 기차는 없었다. 앱을 가지고 검색했더니 버스편이 확인되어 다행히도 Pontoise로, 그리고 파리 북역으로 해서 귀가한다.


 

 

5.

'여행, 길위의 철학'의 한편의 글에서, 밀라노 출신의 계몽주의자들이 사상적으로 앞선 파리계몽주의자과의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교류를 위해 파리를 방문하게 되는데 10월 2일 밀라노를 출발하여 4일에 토리노, 11일에 리용, 그리고 18일에 파리에 도착한다. 도보로 밀라노에서 파리까지 보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흄 중심으로 하여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식견를 달리하는 작자들을 종교재판으로 보내려는 듯한 급진적인 파리의 혁신적 계몽주의자와 다르게 루소 중심의 보수주의적 계몽주의로 남게 된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 논쟁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교훈삼아 오늘은 Giverny, 베르사유궁전은 과감하게 접고 로댕미술관, Musee maillol 으로 정했다. 로댕미술관의 단연 압권은 단테의 신곡 지옥에서 영감을 얻은 '지옥문'과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 대항하여 칼레 시를 지키기 위해 나서는 6명의 영웅에서 영감을 얻은 '칼레의 시민', 그리고 '키스'이다. 다양한 조각 재료들, 조각을 위한 많은 스케치들은 창작이 고단한 과정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로댕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Musee Maillo는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크지 않은 규모의 미술관인데 입구부터 매표를 위한 줄이 계속된다. 특히 프랑스 중년 여성이 무척이나 많다. 전시 작품들은 루소 등과 같은 'Naive' Artists라고 하는, 우리 말로는 여성 누드, 바다, 인물과 같은 일상적인 주제를 각자의 독특하고 다양한 기법으로 풍자적 표현을 하고 있다. 보테르, 프리다 칼로를 연상케하는 작품도 많은데 프랑스인들의 미적 취향을 훔쳐 본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진다.

점심을 위해 지하 2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역시 중년 여성들, 간혹 부부들이 식당을 채우고 있다. 식사와 카푸치노로 요기를 하고 신용카드로 계산하려는데 서빙하던 젊은 프랑스 여성이 우리말로 한국분이냐고 묻는다. 신용카드에 적혀있는 이름을 보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1년 동안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했다며 유창하게 한국말을 한다. 영어 질문에 계속해서 한국말로 응수할 정도로 유창했다. 이름이 로르카라는 것만 확인했지만 손님이 많아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